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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선행 2
야고보서 2:8-13

제19강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선행(Ⅱ) (3.17-19)
(약2:8-13)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논하면서 율법의 3가지 용법을 확인했다. 첫째, 사회를 억제시키며 인도하는 것이고 둘째, 죄를 심판하는 것이고 셋째, 신자들을 의 의 생활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들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기본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첫째는 도덕주의(또는 율법주의)다. 율법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 복음이 손상되는 때는 경건이 고된 훈련이 되며 확신이 줄어든다. 둘째는 이것의 반대되는 위험은 복음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죄와 율법의 필요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는 반율법주의이다. 루터파는 로마 카톨릭에 반율법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①칼빈은 개혁교회가 선행을 부인한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선제공격을 실시한다.
그는 여기서 많은 명언들과 품위있는 문장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하는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든가, 선행이 선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지하여 그것을 자랑하며 그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3.17.1)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한다. 하지만 우리 죄인들은 율법에 매달리면 우리는 그것의 저주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완벽히 준수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심판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구원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3.17.1) 하지만 이는 율법의 모든 약속들이 무의미 하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회복을 얻고 율법의 의를 재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명언은 우리의 타락한 부분 때문에 믿음으로부터 다른 의를 얻기까지는(율법을 통한) 아무 유익도 누릴 수 없다.(3.17.2)

기본적으로 칼빈은 율법의 약속은 여전히 효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단지 그 약속들이 복음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 자체는 우리의 가장된 선행을 책망할 뿐이다. 하지만 복음으로 인해 현실화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반드시 얻지 않은 상태에서도 의의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한다.(3.17.3) 칼빈은 이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선행을 꾸짖으시지만 선행이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받으신다. 둘째, 하나님의 관대하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행위에 가치와 명예를 부여해 주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아시고 우리의 행위를 용서의 영으로 받으신다.

칼빈은 그의 이중용납교리(the doctrine of double acceptance)를 제시한다. 우리 안에는 조금의 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순전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용납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그의 열매인 선한 일들을 이루시기 시작하신다. 즉 칭의가 이루어진 후에는 우리가 우리 선행으로 인하여 용납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행위 때문에 신자들을 용납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께서 그 행위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3.17.5)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용납되었다고 가르치는 모든 성경 본문들이 오로지 우리를 용서하신 그 동일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 순종을 지칭하는 것임을 신중하게 설명한다.(신7:9, 롬9:21, 히3:1, 벧전2:5)

②칼빈은 3권18장에서 상급개념을 다루고 있다.
당시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는 공로와 상급을 연관 짓고 있었으나 칼빈은 우리의 행위가 공로를 가져온다는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맞서 싸웠다.(3.14.14) 칼빈은 상급개념을 현실적이라 인정하면서 성경에도 뚜렷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은 보응하신다.(롬2:6)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된 것이 우리의 참된 상급이며 그것은 양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상급을 약속하신 이유는 우리를 교만케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영생의 위대한 목표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십자가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현세에 그릇된 투자를 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3.18.4) 칼빈은 면류관도 우리를 의롭다하신 동일한 은혜로부터 나는 선물이라 한다.(3.18.5-10) 6절에서 천국의 보물개념을 다룬다. 이 절(마6:19-21)은 행위의 가치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선순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천국이 우리가 거할 곳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소유를 지상에 두었다가 갑자기 옮김으로 손해를 보는 것보다 하늘나라로 미리 이전해 놓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칼빈은 고난이 신적 약속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강화시키기 위한 구절(살후1:5)이라 설명한다. 고13장과 같은 사랑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다는 반대의견을 다루면서 믿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얻을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하셨기 때문에 순종에는 공로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선과 악을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자신을 어떤 상태에 두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의 반대자들처럼 믿음은 때때로 공로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요6:29) 그러나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를 포용하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율법중 사소한 부분이라도 어기는 것은 율법전체를 어기는 것이다.(약2:10-1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규탄은 죄가 축적된 결과가 아니라 단지 불신앙으로 인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루터의 의견을 부인한다. 즉 칼빈은 불신앙이 모든 악의 근원임에는 동의하지만 그는 실제로 율법을 어기지 말라고 경고한다. 선행은 매우 필요한 것이지만 오직 은혜로 인해 입양된 하나님의 양자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루터는 믿음에 대비한 불신앙을 설명할 때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③ 3권19장에서 자유를 다루고 있다.
그는 양심을 일컬어 칭의의 부속물이라 칭하며 자유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등 어느 것도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3.19.1)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세 부분이 있다고 설명한다.

ⅰ) 양심은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는데 있어서 모든 율법의 의를 뛰어 넘어야 한다.
ⅱ) 진정한 자유란 강제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즉 양심은 강요에 의하지 않고서 양자된 자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ⅲ) 가변적(사소한) 일들에 대한 것이다.

가령 신자가 의심을 품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양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3.19.7 가변적 일들에 대한 고전8-10장 3:19, 16 본문을 언급한다.) 모든 일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위해 그 일들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가 가변적 일들을 행하는데 있어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일은 하나님께 속해야 하므로 가변적 일은 없다. 자유라는 이름하에 일어나는 낭비에 대해 경고한다.(3.19.9) 비록 우리는 웃고 잘 먹고 부를 축척하고 음악을 즐기고 포도주 마시는 것을 금지 당한 적이 없지만 욕망에 따라 폭식을 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자유를 행사하는데 있어 정도를 벗어난 것이며 정도를 지키는 모든 감각을 상실한다.

3.19.10-13에서 자유가 어떻게 연약한 형제들의 양심을 올바르게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연약한 형제를 향한 적절한 존중과 인간들 앞에서 우리의 자유함을 공표할 필요성을 신중하게 구별한다. 약한 형제와 율법주의적 바리새인들을 구별해야 하며 그 결과에 의거하여 행동해야 한다. 이웃을 돌보는 것을 통해 항상 우리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자유행사를 포기해야 한다.(3.19.12)

3.19.14-16에서 4권에서 상론할 세속정부에 대한 언급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헌법에 대하여 올바른 방법내에서 자유하기를 권면한다.(여기서 헌법은 교회 헌법을 말한다. 4.10.8-18)
우리는 영적 정부와 세속적 정부 즉 두 개의 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다. 정부가 비록 관리들에 의해 통치된다 해도 우리는 정부보다는 교회에 더욱 속하여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칼빈에게 양심은 마음의 심판을 위한 자리다. 칼빈은 Quintallian을 인용하여 양심을 천명의 목격자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 한다.(3.19.15)

그러므로 행위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선한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고결함을 의미한다.(3.19.16) 칼빈에게 영성은 신적 의 미를 갖고 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정결한 양심을 가지고 행하고자 할 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당한 말이지만(행24:16) 기본적 관심사는 양심이 하나님 한 분만 경외하는 것이다. 땅위에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여전히 따르려 할 것이다.

이종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