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강 선택과 예정 : 하나님의 주권적인 표현 (3.21-24)
(엡1:3-14, 롬9:13-18)
에베소서 1장 3-14절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2)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9장 13-18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 배경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어거스틴(354-430)을 제외하고 칼빈과 같이 선택교리와 동일시 된 인물도 드물다. 사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에 이를 때까지 선택에 대한 교리를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전형적인 뛰어난 예정신학자로 간주된 것은 그의 주석과 신학 또는 설교보다는 反칼빈-루터파(anti-Calvin Lutheran) 들의 성공과 계몽운동이 가져다 준 효과에 기인한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파와 중도 펠라기우스파에 대항하여 확고한 예정교리를 가르쳤다. 이중 예정설(double Predestination)교리는 중세 초기의 Godescale of Orbais(c.804-c.869)와 중세시대 전체에 존속되어 있었다.
예정론은 중세신학의 핵심사안 중 하나였기에 중세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다루었다. 중세 최고의 신학자 Thomas Aquinas(c.1224-74)는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이중예정에 대해 가르쳤다. 이중 또는 절대적 예정은 교회 전체 역사를 통해 가르친 보편적 교리였을 뿐아니라 16세기 내내 범개혁교회 교리이기도 했다.
종교개혁 기저에 깔려있어 종교개혁 운동을 가능케 했던 독특성은 바로 이 예정에 대한 교리였다. 루터, 멜랑히톤, 부서,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등 종교 개혁가들에게 예정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루터는 예정론에 대해 탁월하게 주장했다. 개혁교회 신앙의 요소들을 학문적으로 진술하여 예정론을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은 칼빈이 아니고 멜랑히톤이었다.(B.B Warfield, "Calvinism' in Calvin & Calvinism NY: Oxford Uni. press. 1931, 357-58)
도르트신조(1619)를 촉발했던 개혁 신학자들과 반항론자들 사이의 약30년간의 논쟁은 예정교리였다. 이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예정론에 얽매여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2. 로마서 주석
칼빈의 로마서 주석(1540)의 확실한 기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강의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교사(sacrarum litterarum doctor)로 임명되었다. 그는 바울서신에 대한 강의를 로마서부터 시작했다.
주석을 시작하자마자 칼빈은 우리의 유일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애이며 이 인애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며 신앙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칼빈의 예정교리가 신학적이고 주석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칼빈의 예정교리를 분석하려는 시도는 칼빈이 종교개혁의 핵심교리인 이신득의(以信得義)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는 로마서를 주석하는 일로부터 예정론이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로마서 9장에서 언약의 수호자요 준봉자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선(a Christo abhorveve)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를 갖고 시작한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 후손 때부터 이전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는 약속된 속량자가 아닌가. 그 설명에 대한 근거로 바울의 선택교리를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신분은 이중적(duplex)이었다. 육신적으로 모든 이가 은혜언약에 참여하는 자손으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 일부는 언약밖에 있었고 다른 이들은 신앙을 통하여 언약에 참여하는 아들의 위치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오로지 야곱과 에서의 예를 통해서만 설명 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 했다. 이 선택이 하나님 한 분의 인애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그것을 갈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언약을 주셨다는 동일한 부분이 에서와 이스마엘이 이삭과 야곱이 누리던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 은혜를 동일하게 누렸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바울은 주님께서 그 언약을 그들에게 최초로 주셨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모든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칼빈은 부인한다. 칼빈은 이 구별점을 기독교강요 3권21장7절에서 일반선택과 특별선택으로 구별하여 언급했다. 참이스라엘인은 가계혈통이나 전문가의 직함 또는 외부적 신호를 통해서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유대인을 구성하는 것은 할례(롬2:25 세례)가 아니라 그것은 개인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마서 9:6 주석에서도 칼빈은 바울이 이스라엘에 속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인이다 라는 것을 부정하였다고 서술한다. 로마서9;11 주석에서도 모든 할례 받은 자가 공동체적인 언약에 의해서 양자가 된다 하더라도 은혜가 이 모든 이에게 있어 유효한 것은 아니라 했다.
그리스도의 유익을 누리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은 순전히 선택으로 인하여 구별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은혜이다.
3. 기독교강요(3.21-24)
칼빈은 선택과 유기 안에 신적 판단의 웅장함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구원의 희망을 주어 양자 삼는 것이 아니라 몇몇에게는 주어지고 몇몇에게는 부인되는 이런 비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 예정에 대한 질문이 생길 때의 단 한 가지 안전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신적 의지의 비밀(voluntatis suae arcane)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나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며 이것을 통해 각 사람에게 연관된 하나님의 의지를 당신이 구성하신대로 나타내시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신성불가침의 범위로 남아 있다.
① 영원한 선택 :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3.21 칼빈은 예정론을 역설하지만 공식적 논의는 신론이 아닌 구원론에서 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의 차이가 각개인의 자의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의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모든 결정 위에 위치시키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②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립 :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서 온다.(3.22) 창세전에(엡1: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편에 있는 가치를 하나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 그 기쁘신 뜻대로(엡1:5)는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의 수단을 일체 배제한다.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담후1:9, 엡1:4)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나니’(요6:44-45)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요17:9, 15:19)
③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된다. 더욱이 악인들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3.24) 소명은 선택에 의존한다. 따라서 오직 은혜의 역사이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 할 수 있다. 예지, 예정, 부르심, 거듭나게 하심, 믿음, 회개, 양자, 칭의, 성화, 영화롭게 시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머무신다.(마3:17)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스도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구원의 닻이며 하늘나라의 상속자이시다. 선택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녀로 삼아주신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선택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엡1:4)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확신을 발견치 못할 것이다.
4. 에베소서 설교
1558.5-1559.3 예배에서 에베소서 강해를 St. Peter's예배당에서 했다. 그는 성경말씀을 그가 가질 수 있는 최상위의 가치로 여겼다.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본질적인 권위를 지닌다. 하나님 말씀 권위와 하나님 당신의 권위라는 표현을 통해 회중들에게 공표되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둘도 없는 유익이며 선택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우리가 믿게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중은혜이기도 하다. 몇몇은 믿고 몇몇은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뚜렷이 드러낸다.(에베소서 설교. 26)
기독교강해에서처럼 칼빈은 우리의 선택이 우리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칼빈의 설교는 선택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복음 설교만 수반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적용이기도 했다. 칼빈에게 선택교리는 도덕적으로 나태케 하는 자극이 아니라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에게 보이신 무상 은혜의 표현이므로 경건을 위한 강력한 자극이다.